“적당한 때 이혼하자”, 가혹한 자기검열을 멈추게 한 다정한 선언.

사람은 기억의 지배를 받습니다. 오늘 내가 내리는 선택, 남을 향한 차가운 시선, 불안이나 서글픈 감정의 뿌리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그 곳에는 아픈 과거의 파편들이 숨어있습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잘 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뒤쳐진 황동만(구교환 분)과 박경세(오정세 분)의 서사를 통해, ‘당신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건넵니다.

드라마 속 두 사람은 내면의 상처/기억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도리어 그 칼끝을 서로에게 겨누며 지독한 독설을 퍼붇고 상대를 없애려 합니다. 사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못난 모습’을 상대에게 투사하고 도망하려는 것이었지요.

갈등이 극에 달해서, 동만이 경세에게 “위를 따라잡을 생각을 하라”며 모진 날을 세우던 순간, 동만은 자신의 감정워치에서 “후회”라는 감정단어를 보게 됩니다. 비수 같이 아프지만 가치 있는, 진짜 속마음과의 직면입니다. 이 쓰라린 깨달음이 있었기에 동만은 훗날 신인감독상의 시상대에서 미소지을 수 있었습니다. 20년이라는 초라한 세월을 ‘지금의 나를 만든 소중한 일부’로 온전히 품어 안았기 때문입니다.

혜진(강말금 분)이 경세에게 건넨 “우린 적당한 때 이혼하자”는 대사는, 이 드라마가 가진 치유의 서사를 압축하는 가장 결정적인 명대사로 보입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삶의 흐름에 그저 유연하게 몸을 맡기자는 다정한 제안이지요.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재의 삶과 관계를 숨 막히는 검열 없이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못난 상처를 외면하고 회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때가 지나고, 또 시간이 흐르다보면 마주해야 할 때가 옵니다. 기억이 나를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질 때, 혼자 그 무게를 다 짊어지려 하지는 마세요. 내 부끄러운 고백까지도 가만히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좋고, 일기를 적어 보셔도 좋습니다. 못난 마음을 다정하게 바라봐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길고 외로웠던 ‘무가치함’과의 싸움을 끝내고 안온함을 찾는 단순하지만 가장 용기있는 출발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2026년 4월 18일~5월 24일,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입니다. 박해영 극본, 차영훈 연출.

더 읽을 거리: 이부영 지음(1999), <그림자> 한길사.